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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국제 이슈, 사회, 정치

[펌] 거지갑 박주민 의원의 귀엽고 찡한 일화들 모음.txt

by 잡글서점 2016. 12. 3.

박주민에 대한 짧은 기억


세월호 이후로 관련 집회에서, 그리고 매체에서, 그러니까 먼발치에서 그를 지켜보아왔습니다. 진보언론, 팟캐스트를 통해서도 '아, 박주민 이런 사람이구나' 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를 가까이서 딱 한 번 마주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게 작년 민중총궐기였습니다. 백남기 노인이 쓰러졌던 종로구청 사거리, 바로 거기서요..

집회 당일 금속노조 조합원인 선배와 함께 금속노조 대열에 있다가, 금속노조의 행진 순서가 뒤로 밀린 까닭으로 농민분들과 함께 대열의 거의 맨 앞에서 행진에 참여했습니다. 종로구청 사거리에 차벽이 촘촘하게 쳐있었고, 경찰은 대열 맨 앞이 차벽 근처에 도달하자 마자 물대포를 쏘기 시작했어요.

 

저와 일행은 캡사이신 물대포를 한 번 뒤집어 쓰고 콜록거리면서 인도로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익숙한 얼굴 - 정말이지 초라한 행색의 -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바로 박주민이었습니다. 팩트tv가 그를 취재하고 있었는데 경찰은 그 때 인도로도 무자비하게 물대포를 쏘아대던 때라 그와 저희 일행 좌 우로 강한 캡사이신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던 상황이었죠.

 

그는 유난히 캡사이신에 대한 민감성이 높았는지 말을 거의 잇지 못하고 재채기와 기침을 해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련하게 계속 재채기를 거듭하면서도 경찰의 강경진압과 차벽설치의 위헌성을 고발하고 있었죠. 

 

그리고, 경찰이 그를 알아본건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물대포가 정확하게 박주민 변호사를 겨냥했습니다. 직격에 가깝게 물대포에 맞은 박주민 변호사는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기침때문에 말을 거의 잇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끝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고 그 현장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차벽 설치의 위헌판결을 받아낸 변호사가 또다시 차벽 앞, 시위대의 제일 선두에서 물대포를 맞아가며 다시 차벽의 부당함에 대해 고발하고 있는 이 웃기지도 않은 상황... 그리고 초라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진심을 다해, 약자를 위한 자신의 싸움을 해나가고 있는 박주민 변호사의 모습 때문에 괜히 눈물이 났던 기억이 나네요. 아주 짧은 만남이었고 그와 대화 한마디 나누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진심만큼은 제 마음속에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늘 약자의 친구였던,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서 약자를 위해 모든 것을 해왔던 그가 드디어 국회에 입성하였습니다. 그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늘 그 모습 그대로 힘없고 빽없는 사람들을 위해 싸워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곧 세월호 2주기네요. 광장에서,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싶습니다. 고생했다고. 힘내라고. 앞으로 더 싸워달라고.

 

..........

 

선거 운동 당시에

경로당에 가서 자기 PR을 할 때


어필할게 너무 없어서 서울대 법대 나온걸 어필하라고 하는데

그게 너무 부끄러워서 도저히 입에서 안떨어지더라 라고 하는 부분.

그런데 결국 했다고.


저는 이부분이 너무나 인간적이고 귀엽게 느껴지더라구요.

 

..........

 

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m=search&p=1&b=bullpen2&id=6646952&select=sct&query=%EB%B0%95%EC%A3%BC%EB%AF%BC&user=&reply=

 

은평갑 주민입니다.



이번 총선에서 갑자기 저희 동네에 공천 되었습니다.


저는 이사람이 어떤 사람인줄 알았지만, 이미 예비후보들은 모두다 명함 돌리고 있었고



거지갑은 갑자기 들어와서 주민들 아무도 모르는 상황..



당선 된게 기적이라고 할만 한데..




저희 동네에 불광천에서 유세 하는데 진짜 사람 한명도 없는데


거기다가 눌변이라.. 말도 잘못하는.... 엎친데 덮친격 이라 사람이 적음.. ㅠㅠ



지나가다가 괜히 박주민 박주민 외쳐주고.. 가만히 서서 이야기 들어 주는데


말 되게 못하지만 그냥 앞에서서 들었습니다.



저 서서 들으니 사람들이 모이더라고요  ㅠㅠ



명함 돌리는데 아무도 안받아 갈때 



명함 받아서 집에 명함만 30장 넘게 있습니다.



명함도 처음에 주지도 못하고 진짜 그냥 서서 인사만 하는데


가서 정말 쪽팔리자만 크게 명함 주세요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명함 주는데 목소리가 말도 잘 못하고 ..


박주민 입니다 라고 되게 소곤 거려서



쪽팔리는것 감수하고 세월호 진실 꼭 밝혀주세요 응원 합니다 하고  엄청 크게 말 하고 악수하고



기운 드리고 커피 드리고 그랬습니다..



이것도 제가 명함 받으니까 다른 분들도 한명씩 받아 가더라고요



아무래도 거지갑이 정치 처음 해서 어쩔줄 몰라 해서 주변에서도 알아 보지만 못 다가 간것 같은데


제가 서 있고 명함 받아가니 다른 분들도 받아 가신것 같더라고요.



별거 아니지만, 나름 당선에 0.0000000000000000000001% 정도는 일조했다고 생각 합니다.




제 나름대로 같은 동네사는 여동생과 엄마, 제 친구들에게 이야기 하고


꼭 뽑아 달라 부탁 하고..;


국회의원선거에 이리 부탁한게 처음일 정도로 이야기 하고 다녔는데..


진짜 50% 넘게 득표해서 당선 되니 얼마나 기쁘던지



요즘 잘한다고 칭찬이 자자 하니 


제가 더 뿌듯합니다. 으하하

 

..........

 

프로필 사진과 실물의 괴리가 너무 큰나머지, 유권자들이 후보자를 못 알아보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당선인 본인이 선거가 끝난 후 밝힌 이야기에 따르면 첫날에 명함을 나눠줬는데 "명함 속 사람 어디갔냐" 식의 반응과 핀잔을 받은 게 매우 큰 충격이였다고... 

 

결국 캠프에서 긴급회의를 해서 지금까지 찍은 홍보물을 모두 폐기하고 새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후보가 홍보물 속 박주민을 따라갈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한다. 결국 홍보물에 본인을 맞추기로 하여 부분가발을 쓰기로 했다고 한다 선거운동 당시 후보자 본인이 직접 명함을 건네길래 명함을 받았는데 선거 참모인 줄 알았다.

 

 

 

..........

 

-주갤펌

 

거지갑이 신임 소대장으로 왔을 때 난 막 상병 꺾이었듬


근무지는 경비소대였고 소대장1명과 선임부사관2명이 근무에 맞춰 24시간 소대를 지휘했듬


당시 내 위로 병장 7명이 있었는데 거지갑한테 비협조적이였듬


전임 소대장은 공군 사관 98기였고 나름 젠틀했는데


거지갑은 뭐 지금이나 그때나 변함 없는 모습이었고 ㅋㅋ


사관 100기 아님 101기였는데 숫자가 세자리로 늘어나니 병장들은 짬밥없는 신병 취급함


아무튼 신임소대장으로 오고 나서 초반에는 기싸움이 팽팽했듬


문제는 근무 초소 배정에서 자주 나타났는데


거지갑은 모든 소대원이 공평하게 근무하기를 원했듬


예를 들면 초소 환경이 좋은 곳을 고참들이 독점하는 시스템을 고치려 함


우리 소대는 서서 경비서는 곳과 외벽 초소에서 근무하는 곳이 섞여 있었는데


근무시간 내내 서서 경비서는 곳은 당근 졸병들이 갔었듬


거지갑이 초소는 고참과 신병이 골고루 들어가야지 신병만 들어가면 관리가 잘 안된다고 하니깐


고참급들이 거의 들고 일어날 정도로 반발함


최고참급 한테 제일 빡세기로 소문난 활주로 X-X초소를 들어가라고 하니


눈을 부라리면서


"아 애들 보기 창피하게 왜이러십니까...애들 시키지 왜 절 주십니까?"


다른 고참도


"원래 우리 소대는 이랬습니다. 군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깽판침.


그 순간 속으로 아 ㅅㅂ X됐네... 오늘 밤 뭔일 터지는거 아니냐... 라고 생각하는 순간


거지갑이 "ㅇㅋ 알았듬 고참들 예전처럼 근무하셈" 이러는 거임


휴 난 다행이라고 생각함...


아참 내 보직을 말해주면 난 초소 근무자의 상번과 하번을 돕는 운전병이였듬


정해진 시간 초소 근무자 상하번 + 정해진 시간 소대장 혹은 선임하사를 태우고 초소 순찰을 돔


초소 순찰을 돌 땐 제일 첫번째 초소에서 소위 깨스 라는 걸 넣는데


순찰자가 가니 쳐 자고 있는 사람들은 일어나라는 신호를 초소 비치 전화로 걸어줌


아무튼 그날 난 야간이라 당직실 대기하면서 책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거지갑이 탄띠를 매더니 순찰 나가자고 함


시계를 보니 순찰시간이 아닌데 나가자고 해서 궁금했지만 그냥 닥치고 순찰 나감


활주로 졸병 초소부터 돌기 시작했는데 평소처럼 초소 들어가서 사인 하고 나옴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외곽담장 고참 근무 초소를 갔는뎈ㅋㅋㅋㅋㅋㅋ


아낰ㅋㅋㅋㅋㅋ 초소 들어가서 경계근무 복장상태부터 초소 비치물 점검까지 완전 개 FM대로 함


그리고 그날 원래 돌아야할 3번의 순찰을 소대장 재량으로 9회로 늘려버림 ㅋㅋㅋㅋ


고참들 근무 들어가서 20분마다 소대장 순찰 영접해야했듬 ㅋㅋㅋㅋ


처음엔 이게 뭔 짓인가 나도 짜증이 났는데


그렇게 딱 일주일 하니깐 고참들이 먼저 꼬리내리고 활주로 근무 자청함 ㅋㅋㅋㅋㅋㅋ


그랬더니 거지갑 왈


"님들이 나 무시하는거 같아서 좀 괴롭혔는데 미안함...


그동안 졸병 때 활주로 근무로 힘들었을텐데 또 보내서 미안함...


하지만 어느정도 근무 군기 잡히면 다시 외곽초소로 보내드림


우리 소대 사고 없이 전원 제대 잘 하고 외박도 팍팍 나갈 수 있게 근무 잘서자는 취지에서 함

 

..........

 

올 4월 영화 '업사이드 다운'의 GV 행사 중


유경근 4.16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과 최강욱 변호사가 패널로 나오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GV가 있던 날이 총선이 끝난 후 그 다음주 월요일이었습니다.


시기가 시기다 보니 박주민 의원(물론 당시는 당선인)의


더민주 입당, 지역구 선정 및 선거운동 과정에 대해 얘기가 나왔었는데


최강욱 변호사가 박주민 의원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 바 있습니다.


"생긴게 표 찍어주고 싶은 게 아니라, 밥 한 번 먹이고 싶은 사람"

 

 




약자들의 변호사 시절

 



 

그를 처음만난 건 2년전 여름이다.

박주민...이름만 들어봤던 사람이다.

처음 봤을 때 변호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외모 때문인지 그가 박주민인걸 몰랐다.

며칠 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변호사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서야 그가 박주민 변호사인걸 알았다.

그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던 것 같다.

하긴 그때는 행색이 남루한 것이 피차일반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인 얼마 전에야 그가 명문대 출신의 잘나가던 로펌 변호사 였다는 걸 알았다.


2년 전 여름, 세월호 국정조사가 여야의 대립으로 증인심문도 못하고 막을 내리자

특별법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특별법을 둘러싼 여야의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며 시간이 흐르던 중...

특별법이 졸속으로 합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화가난 그가 내게 따지듯이 물었다.


“안그래도 힘든 유가족들은 세상을 바꾸려고 저렇게 힘들게 싸우는데, 당신네들! 너무하는거 아닙니까?”

나는 할 말이 없어 그냥 “미안합니다” 했다.

매일 그는 유가족의 곁을 지켰다.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는 것은 그때 그곳에 있던 분들 모두가 같았다.

그래서 겉으로는 누가 유가족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고 박주민은 더더욱 그러했다.

며칠이 지나도 그날 화가나서 내게 따지던 그의 목소리가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였을까

얼마 전 출마하려는데 좀 도와달라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그가 걱정되었다.

사나운 정글에서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나의 기우였다.

그는 잘 해오고 있다.


늦은 밤 집에 들어가는 박주민의 어깨를 보면 그가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거워 보였다.

내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더욱 마음 아팠다.

후보 어깨가 구부정하다며 한마디씩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사실 그는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길거리에서 노숙하느라 허리가 좋지 않았고 밤에는 그 통증이 더 심했다.

기껏해야 하루에 2시간 정도를 잘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난 아침부터 잔소리를 해야 했다.

하기 싫은 일이지만 해야 했다.

그에게는 질 수 없는 이유가 너무나 많았고

나는 그 이유들의 상당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정치권에 들어온 이후 매일 상처 받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가 받은 상처들은 매일 그를 돕겠다고 찾아오는 평범한 사람들이 치유해 줬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박주민과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치유되는 것 같았다.

오늘 밤, 그 결과가 어떻든

나는 박주민과 그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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